거창저널 입력 2026년 10월 26일아버지가 마련해준 합판에서 시작해 프랑스로…정영기 화백의 ‘거듭’
그림을 반대하던 아버지의 손길, 아들의 꿈을 다시 일으키다
대구 갤러리 바제서 12월 13일까지…35년 예술 여정 담은 귀국전
아들이 어렵게 마련한 화구를 도끼로 부쉈던 아버지가, 풀이 죽은 아들을 보고 큰 합판으로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림을 향한 아들의 마음을 끝내 외면하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프랑스에서 약 30년간 활동한 정영기 작가의 예술 여정에는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리한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집념과 아버지의 손길은, 오랜 세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일궈온 작가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정 작가의 귀국전 ‘거듭(Again & Again)’이 지난 10월 24일 대구 수성구 갤러리 바제에서 개막했다. 오는 12월 13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프랑스 체류 시절과 2021년 귀국 이후 축적한 작업을 선보인다.
화구를 부쉈던 손으로 아들의 꿈을 보듬다
프랑스 시절부터 정 작가와 우정을 이어온 김창진 거창저널 발행인 겸 편집인은 작가의 어린 시절에 얽힌 사연을 전했다.
정 작가는 부모님이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던 시절에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화구를 샀다. 스스로 번 돈으로 그림을 그릴 도구를 마련할 만큼 열정이 깊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화구를 도끼로 부숴버렸다고 한다.
이후 기운 없이 풀이 죽은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큰 합판으로 아들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아들의 꿈을 막았던 손이 이번에는 그 꿈을 이어갈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사연은 정 작가가 그림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배경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반대와 아들의 좌절로 끝날 수도 있었던 기억에, 아버지가 손수 마련한 합판이 더해졌다. 그 안에는 갈등을 넘어 아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부정(父情)이 담겨 있다.
가마니를 짜던 아버지의 손, 실을 쌓는 아들의 작업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정 작가의 조형 작업에도 이어진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마니를 짜던 모습은 실을 반복해서 배열하고 겹치는 작업의 출발점이 됐다.생계를 위해 재료를 한 올씩 엮던 아버지의 노동은, 훗날 아들의 손을 거쳐 선과 면을 구성하는 예술적 표현으로 확장됐다. 정 작가는 실을 쌓고 배열하는 과정을 통해 시간의 축적과 기억, 반복되는 노동의 의미를 작품에 담아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실과 아크릴, 거울 등을 결합한 조형작품을 만날 수 있다. 촘촘하게 이어진 실과 반사된 이미지가 겹치면서 관람 위치와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른 공간감이 나타난다.
전시 제목 ‘거듭’은 이러한 반복과 축적의 과정을 가리킨다. 같은 손작업을 이어가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시간과 경험이 더해진다. 어린 시절의 기억 역시 현재의 재료와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 앞에 놓인다.
영남대에서 디종으로…프랑스에서 이어온 창작활동
정 작가는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최고의 디종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약 30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조형 세계를 발전시켰다.
쿠르브부아 초대전을 비롯해 ‘November à Vitry’, ‘Réalités Nouvelles’ 등 해외 전시에 참여했으며, 국내에서는 부산비엔날레에도 참가했다.
2021년 귀국한 뒤에는 강원도 영월에 작업 공간을 마련하고 창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해외에서 쌓은 예술적 경험과 귀국 이후의 시간, 그리고 오래된 가족의 기억을 함께 살펴보는 자리다.
개막 현장에는 김창진 발행인이 신아일보 신중강 기자와 함께 참석해 전시를 축하했다. 프랑스에서 인연을 맺은 친구의 작업을 국내 전시장에서 다시 마주한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련해준 큰 합판은 아들이 그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내어준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이어진 꿈은 프랑스에서의 오랜 활동을 거쳐 고국의 전시장에 닿았다. 정영기의 ‘거듭’에는 한 작가의 집념과 시간, 그 곁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담겨 있다.
전시 관련 자세한 사항은 갤러리 바제에 문의하면 된다.